우울함은 정말 당신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온몸이 찌푸둥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딱히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스트레스 원인이 떠오르지 않는데도 말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의지가 부족하다거나 마음이 약해졌다고 스스로를 탓하곤 합니다. 혹은 머릿속 신경전달물질에 불균형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며 두개골 안쪽의 뇌만을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오랫동안 현대 의학과 신경과학 역시 감정과 기분은 오롯이 뇌의 영역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모든 알약은 머릿속 신경세포 사이의 신호 전달을 조절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최근 과학계에서는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진짜 지휘봉이 뇌가 아닌 전혀 뜻밖의 장소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음식을 소화하는 배 속, 장입니다.
우울함은 정말 당신의 마음이 약해서 생긴 걸까요
오랫동안 의학계에서는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를 신경세포 사이의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해져 발생하는 뇌 전용 질환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마음이 우울한 것은 뇌의 문제이고, 장은 그저 음식을 분해하고 영양분을 흡수한 뒤 남은 노폐물을 배출하는 단순한 소화 기관에 불과하다고 여겼지요. 장이 뇌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식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뇌가 장에 명령을 내리는 일방통행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긴장하면 배가 아프거나 체하는 현상이 그 증거로 제시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단단한 통념을 깨부수는 소식들이 세계적인 과학 저널을 통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뇌가 장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에 살고 있는 수십조 마리의 미생물이 우리의 기분과 행동, 나아가 정신 건강까지 조절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조절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뇌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장내 미생물과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기존의 의학적 패러다임을 뒤흔들었습니다.
장속 미생물을 옮겼더니 쥐의 기분이 바뀌었습니다
장내 미생물이 기분에 미치는 영향을 명확히 증명해 낸 대표적인 연구는 2016년 국제 학술지 마이크로바이옴에 발표된 실험이었습니다. 중국 중경의과대학 연구진과 아일랜드 유니버시티 콜리지 코크의 앤드루 홈즈 교수 연구팀은 우울증 진단을 받은 환자들과 건강한 사람들의 대변에서 장내 미생물을 추출했습니다. 그리고 균이 전혀 없는 무균 상태로 자란 실험용 쥐들에게 이 미생물들을 각각 이식해 보았습니다.
결과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의 장내 미생물을 이식받은 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과 유사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쥐들이 좋아하는 설탕물을 줘도 마시지 않는 거식증세를 보였고, 물에 넣었을 때 헤엄치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떠 있는 등 의욕 저하 상태에 빠졌습니다. 반면 건강한 사람의 미생물을 이식받은 쥐들은 여전히 활기차고 호기심 많게 행동했습니다. 머릿속 뇌를 건드린 것이 아니라 단지 장속에 사는 미생물의 종류를 바꾸었을 뿐인데, 동물의 기분과 행동 양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에서도 이와 동일한 패턴이 확인되었습니다. 2019년 학술지 네이처 마이크로바이옴에 게재된 벨기에 루벤 가톨릭 대학교 예론 라에스 교수팀의 연구가 대표적입니다. 연구진은 벨기에의 플람스 장 미생물 프로젝트에 참여한 1,000명 이상의 데이터와 대규모 임상 결과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우울증을 겪는 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코프로코커스(Coprococcus)와 다이알리스타(Dialister)라는 특정 장내 세균 두 종류가 눈에 띄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이 연구는 인간의 기분 장애와 장내 미생물 생태계 사이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과학적으로 입증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뇌로 향하는 고속도로와 신비로운 화학물질 생산 공장
그렇다면 장속에 서식하는 자그마한 미생물들이 어떻게 단단한 뼈로 둘러싸인 머릿속 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일까요. 과학자들은 이 통로를 장-뇌 축이라고 부릅니다. 장과 뇌는 크게 세 가지의 은밀하고 정교한 경로를 통해 24시간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경로는 미주신경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신경망입니다. 미주신경은 뇌간에서 시작해 가슴을 지나 장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 일종의 광케이블 고속도로입니다. 2011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발표된 존 크라이언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유익균인 락토바실러스 람노서스를 섭취한 쥐는 불안 증세가 줄어들고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장과 뇌를 연결하는 미주신경을 절단하자 이러한 감정 개선 효과가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장내 미생물이 미주신경이라는 물리적 전신주를 통해 뇌로 직접 신호를 보낸다는 명확한 증거였습니다.
두 번째 경로는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대사물질입니다. 장내 미생물은 우리가 먹은 식이섬유를 먹이로 삼아 소화하면서 단쇄지방산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냅니다. 부티르산, 아세트산, 프로피온산 같은 단쇄지방산은 혈관을 타고 몸 전체로 이동합니다. 이 물질들은 뇌를 외부 이물질로부터 보호하는 두꺼운 장벽인 뇌-혈관 장벽을 통과하여 뇌 신경세포의 염증을 줄여주고, 새로운 신경망이 형성되도록 돕습니다. 장내 미생물 상태가 나빠져 단쇄지방산 생산이 줄어들면, 뇌에 은밀한 염증 반응이 생기면서 우울감과 피로감이 몰려오게 됩니다.
행복 호르몬의 진짜 고향은 머리가 아닌 배 속에 있습니다
장내 미생물과 기분의 관계를 말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신경전달물질의 생산입니다. 흔히 우리는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세로토닌이 머릿속 뇌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몸 전체 세로토닌의 약 90퍼센트 이상은 뇌가 아닌 장에서 만들어집니다.
2015년 학술지 셀에 발표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일레인 샤오 교수팀의 연구는 이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장 벽에 존재하는 장관상피 장엔테로신경세포는 세로토닌을 합성하는 일종의 호르몬 공장입니다. 그런데 이 공장은 스스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장내 미생물이 특정 신호 물질을 보내주어야만 비로소 세로토닌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미생물이 전혀 없는 무균 쥐의 장속 세로토닌 농도는 일반 쥐에 비해 60퍼센트 이상 낮았습니다. 장내 미생물이라는 자극제가 없으면 행복 호르몬 공장이 가동을 멈추는 셈입니다.
세로토닌뿐만 마음을 안쇄하고 진정시키는 가바(GABA)라는 신경전달물질 역시 비피도박테리움이나 락토바실러스 같은 장내 미생물에 의해 직접 합성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넘겼던 배 속의 미생물들이 사실은 우리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화학물질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먹은 음식이 내일의 기분을 결정하는 이유
장-뇌 축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기분의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할 때 매운 음식이나 달콤한 초콜릿, 자극적인 배달 음식을 찾는 습관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분이 높고 가공된 음식은 장내 유해균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입니다. 이러한 음식을 계속 섭취하면 장내 미생물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면서 장 벽에 미세한 구멍이 뚫리는 장 누수 현상이 발생합니다.
장 벽의 경계가 무너지면 미생물의 독소와 염증 물질이 혈관으로 흘러 들어가 전신 염증을 일으키고, 이는 곧바로 미주신경과 혈관을 통해 뇌로 전달되어 우울함과 무기력증을 심화시킵니다. 우울해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그 음식 때문에 장내 미생물이 파괴되어 다시 더 우울해지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어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장속 유익균들이 좋아하는 먹이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다양한 색깔의 채소와 과일, 통곡물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식이섬유는 유익균이 단쇄지방산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원료가 됩니다. 김치나 된장, 요거트 같은 발효 식품을 꾸준히 섭취하여 유익균의 균형을 맞춰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과학자들은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미생물이나 먹이를 사이코바이오틱스, 즉 정신유산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힘들고 우울할 때, 그 원인을 오로지 자신의 의지 부족이나 뇌의 문제로만 돌리며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배 속에서 수십조 마리의 미생물들이 불균형을 이루며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당신이 선택하여 식탁에 올리는 건강한 한 끼가, 내일 당신의 뇌를 웃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마음의 약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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